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대한제국)/즉위 배경 (문단 편집) == 철종 승하 당시 왕실 상황 == 그래서 "[[흥선군]]의 정치공작으로 [[철종(조선)|철종]]과 가까운 다른 왕손을 제치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왕이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조선후기 왕실 가계도(혈통).png|width=100%]]}}} || ||{{{-2 {{{#683235 '''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혈통 계보만 그린, 철종 사망 당시(1863년 음12월) [[효종(조선)|효종]] 계열 남계 자손 가계도.[br]연한 노란색 바탕 인물은 친아들 없이 사망한 사람들이며, 저 표의 인물들 중 1864년(고종 즉위년) 1월, 고종의 즉위하는 달 기준 [[영평군(1828)|영평군]]과 [[경은군]](이재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했다.'''}}}}}}|| 그 전에 알아둬야 할 것은 [[왕위 계승의 법칙]] 상 후임 왕은 반드시 선왕의 아랫대나 최소한 같은 항렬에서 나와야 했고[* 사실 유교적 종법상 같은 항렬도 안된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직접 왕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철종과 항렬이 같았기 때문이다.][* [[철종(조선)|철종]]은 예외적으로 항렬상 선왕 [[헌종(조선)|헌종]]의 숙부 뻘이었지만 본인의 가계를 제외한 나머지 왕족들이 너무 먼 왕족들이라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법도를 어기고 즉위시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법도를 어기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나이가 다소 어리더라도 가급적 (헌종과는 같은 항렬인) 철종의 아들뻘 항렬(이'재'O 돌림) 중에서 다음 왕을 정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같은 항렬에서 고르더라도 선왕보다 연상을 후계자로 세우면 안 되었다. 철종 사후 철종의 형 [[영평군(1828)|영평군]]이 즉위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저 당시 철종의 후계자가 될 [[종친]]들 중 핏줄상 가장 가까운 게 '''17촌'''이었다. 5촌 조카 [[이재성]](경은군)이 있긴 했지만 밀려났다. 이유는 후술. 그리고 이재성과 영평군을 제외하면 [[효종(조선)|효종]]의 실제 남자후손이 아예 없었으며 그래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핏줄이 효종 형제들([[소현세자]], [[인평대군]])의 후손들인데 그들 중 철종의 조카 뻘인 사람들은 혈연상 실제로 철종과 촌수가 무려 '''17촌'''인 것이다. [[철종(조선)|철종]]이 사망할 당시 왕손들은 전부 족보상 사도세자의 후손들, 정확하게는 서자 3명 [[은언군]], [[은신군]][*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奉嗣孫)이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지명받았으며 [[항렬]]상 계보가 명확하지 않아서 당시에는 모두들 은신군을 그냥 사도세자의 친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당시 철종의 조카뻘 항렬인 왕손들은 은언군 계열인 [[덕안군|이재덕(덕안군)]], [[경은군|이재성(경은군)]], 은신군 계열인 [[완림군|이재원(완림군)]], [[완영군|이재긍(완영군)]], [[흥친왕|이재면(흥친왕)]], 이명복(고종), [[완은군|이재선(완은군)]], 은전군 계열인 [[인양군|이재근(인양군)]]이 있었다.[* 철종의 형 [[회평군]](懷平君)은 자식없이 죽었고 [[영평군(1828)|영평군]](永平君) 또한 후사가 없었다. 영평군은 훗날 양자를 들이는데, 고종 즉위 이후의 일이다.([[어른의 사정]] 때문에 회평군의 후사는 두지 않았다.)][* 은전군파의 이재근에겐 동생 3명이 있었지만 다 고종 즉위 이후에 태어나서 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